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자이 나가마사 (문단 편집) == 생애 == 1545년 오미국 간논지성에서 [[아자이 히사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자이 가문은 당시 남부 오미의 슈고 롯카쿠 가문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질로 가게 되었다. 당주가 되면서 [[롯카쿠 요시카타]]의 신하라는 의미로 요시카타의 이름에서 글자를 따와 카타마사(賢政)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막부]]를 손에 넣기 위해서 [[상락]][* [[천황]]이 있는 [[교토]]로 올라가는 것. '락' 자는 교토의 옛 별명이 [[낙양]]이었기 때문이다.]을 하려는 길목에 아자이 가문의 거성이 위치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군사력을 소비하지 않으려는 오다와 오다 가문이 더욱 크게 될 것임을 알아봤... 다기보다 남쪽에 롯카쿠라는 강력한 적이 있던 아자이가는 미노 지방의 세력과는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오다 이전 미노의 주인이던 사이토 가와도 혼인 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동맹을 맺고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이치]]와 정략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로 오다 이전 미노의 주인이던 사이토 가와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건 아자이 가가 아니라 남오미를 지배하고 있던 롯카쿠 가였다. 롯카쿠 가와 동맹 상태에 있던 사이토 가를 오다 군이 공격할 기세를 보이자 롯카쿠 가를 견제하기 위해 오다와 혼인 동맹을 맺은 것이라고 보는 게 맞으며, 롯카쿠 가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과 결혼했던 롯카쿠 가문의 가신인 히라이 사다타케의 딸을 돌려보내면서 이름을 나가마사로 고쳤다. 참고로 이 딸과의 사이에서 낳았다고 알려진 아이가 이후 정실인 오이치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는 그의 장남 만푸쿠마루이다. 사이토 요시타츠가 1561년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사이토 다쓰오키는 오다가 전방에서 압박해오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나가마사에게 동맹을 제안하지만 노부나가가 선수를 쳐 나가마사와 노부나가는 동맹 관계를 맺게 되고 1563년 나가마사는 미노 국을 공격한다. 이 때 나가마사가 미노 국을 공격한 틈을 타 롯카쿠가 빈집털이를 시도하자 나가마사는 그대로 군대의 방향을 돌려 롯카쿠를 털어버린다. 원래 아자이 가문의 오랜 맹우인 아사쿠라 가문과 오다 가문은 매우 사이가 나빴는데, 이 때문에 동맹을 맺을 때 '아사쿠라 가문을 말없이 공격하지 말 것', '아사쿠라 가문을 공격하게 될 때에는 먼저 이쪽에 알릴 것'이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그 후 상락에 성공하고 더욱 세력을 확장하던 오다군이 협정을 깨고 포고없이 아사쿠라군을 공격하자, 아자이 나가마사는 고민 끝에 결국엔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효와 맹우에 대한 오랜 의 때문에 오다 가와의 동맹을 파기, 오다군을 공격했고, 궁지에 몰린 오다군은 [[가네가사키 전투]]에서 간신히 퇴각했다. 그 후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을 맞아 제대로 된 일전을 치룬 [[아네가와 전투]]에서 패해 타격을 입었지만 반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되면서 당장 주도권을 잃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부가나는 전황이 불리할 때 천황의 화합하라는 조정서신을 이용하여 시간을 벌었고, 반면 아자이 나가마사의 동맹인 아사쿠라 가문의 영주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종종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의 상경(오다 노부나가의 패권을 인정) 요구를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거부해서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아네가와 전투에서는 아사쿠라 요시카게 본인이 참전하지 않았고 이후 다케다 신겐과 발을 맞추어 출병했을 때도 적설을 핑계로 독단으로 철군해버렸다.] 유리한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 반노부나가 포위망이 다케다 신겐의 사망으로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주도권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넘어갔고 결국엔 아자이 나가마사의 거성인 오다니 성이 노부나가의 대군에게 포위되고 만다.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뒤늦게 아자이 나가마사를 구원하러 출병했지만, 여의치 않아 퇴각하는 도중 오다군과 싸워 도네가사키 전투에서 참패했다. 아자이 가문보다 강성한 아사쿠라 가문이 이 싸움 한 번에 오히려 아자이 가문보다도 먼저 멸망해버리고 말아, 이제 아자이 나가마사를 구원할 세력은 없어졌다. 노부나가는 단번에 진격하지 않고 여러 차례에 걸쳐 항복을 권고했는데, 만약 항복을 한다면 야마토국[* 지금의 나라현]에 새로운 영지를 준다는 - 배반을 싫어하는 노부나가에게 있어서는 파격적인 제안[* 그래서 일부 창작물 등에서는 친동생인 노부유키(또는 노부카츠) 대신 동생처럼 아끼는 사이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한번 동생에게 배신당한 노부나가가 인간불신에 빠지며 제육천마왕이 되어가는 묘사를 집어넣는데, 의외로 설득력이 있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NHK 대하드라마]] 중 한편인 [[공명의 갈림길]]에서도 그 해골을 황금잔으로 바꿔 술을 따르며 "난 그대를 정말 아꼈다네"라는 대사가 나오는 것도 이런 설의 영향인 듯.][* 다만 아무리 배신을 싫어하는 노부나가였다고 하더라도 애당초 아자이 가문이 배반한 이유는 아사쿠라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였고 엄밀히 따지면 노부나가가 아자이 가문과의 약속을 먼저 어긴 셈이었으므로 오히려 아자이 나가마사가 아사쿠라 가문과의 의리를 지킨 것을 배신을 싫어하는 노부나가의 입장에서는 매우 높게 평가할 일이었다. 그런 아자이 가문을 확실히 포섭할 생각이었다면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이었다. 후와 미쓰하루(不破光治, ? ~ 1583), [[풍신수길|기노시타 히데요시]]등도 사자로 보냈지만 나가마사는 계속 거절해 최종 권고도 결렬됐다. 나가마사와 사이가 화목했던 [[오이치]]는 운명을 함께 할 생각이었으나, 나가마사의 권고로 친정인 오다 가문으로 돌아갔다. 오이치가 노부나가의 진영에 귀환할 때, 아자이·오다군도 일체의 공격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오이치가 무사히 돌아간 후 자결하였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나가마사와 그의 아버지 [[아자이 히사마사]]의 해골을 금칠해 술잔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기록이 일차사료인 [[신장공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람의 해골은 현재 일본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의 관습상 성이 함락되면, 성주와 그의 식솔은 자결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오다 노부나가도 아끼던 여동생 [[오이치]]의 죽음을 각오한 냉정한 전투였다. 이때 오이치가 살아서 성을 나올 수 있도록 활약한 것이 [[풍신수길|기노시타 히데요시]]였다. 이 공으로 히데요시는 아자이 나가마사가 다스렸던 북 오우미국의 영지를 고스란히 물려받고, 나가하마 성을 증축하고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일국의 성주가 되었다. 나가마사와 오이치 사이에서 난 자식 중 장녀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생모인 오차차([[요도도노]])이다. 삼녀 오에요([[스겐인]])는 도쿠가와 막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시집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낳았으며 그 뿐만 아니라 히데타다와 스겐인의 딸인 도쿠가와 마사코(徳川和子)[* 본래는 '카즈코'라고 읽는데, 일본 황실에서 [[탁음]]을 꺼리는 관습이 있어서 입궁 당시 읽는 음을 바꿨다고 한다.]가 108대 [[천황]]인 고미즈노오 덴노에게 시집가서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이 바로 109대 [[메이쇼 덴노]]가 된다. 즉 나가마사는 도쿠가와 막부 쇼군의 외조부이자 천황의 외증조부가 되는 셈.[* 그래서 죽은 뒤인 1632년에 정2위 중납언에 추증되었다.] 차녀 [[죠코인|오하츠]]도 유서 깊은 명문인 교고쿠 가에 시집갔다. 장남인 만푸쿠마루는 아자이가가 멸망하자 처형됐으며 이때 나이 9살이었다. 차남인 만주마루는 절에 보내져 주지승려가 되었다. 한편 오사카 성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사나다 10용사]] 중 네즈 진파치의 모델로 여겨지는 아자이 이요리는 3남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태합입지전 5]]에서는 서로 다른 인물로 나오며 아자이 이요리는 [[사나다 10용사]]에 포함되지도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